유난히도 뜨겁고 무더웠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지루하게 내리는 가을장마가 민심과 농심(農心)을 우울하게 하는가 싶더니 섬나라와 대륙을 잇는 반 토막 난 한반도에는 독도의 열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먼저 때린 사람은 우리인데 맞은 놈보다 때린 사람이 왜 더 아픈지 이래저래 몸살기운은 더해지고 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우기는 것을 지록위마(指鹿爲馬)라 했던가? 일본의 끝없는 대륙진출의 교두보는 역시 한반도일진데 어찌 그 빌미를 독도에서만 찾고 있는지 묻고 싶다. 지난 36년간 한반도를 침탈하여 한반도의 주권과 영유권 및 통치권을 모두 지배했던 일본은 어찌 남과 북을 포함한 한반도를 모두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는가? 근거도 없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면서도 일본이 주권과 영유권 및 통치권을 모두 침탈하여 36년 동안이나 실효적 지배를 해온 이 땅에 대하여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일말의 양심이라도 살아있다는 반증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대마도가 우리 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국제사회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지...... 침략과 약탈의 역사 속에서 익숙해져 버린 백의민족이라 할지라도 백의점흑(白衣點黑)의 역사는 털어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대마도는 지리적으로도 부산에서 49.5㎞, 일본 후크오카에서 135㎞ 떨어진 섬으로 일본 본토보다 우리나라와 훨씬 가까운 섬이다. 1822년에 발간된 경상도읍지, 삼국접양도, 조선팔도지도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듯이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임이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바 있으며, 1592년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에 조공을 받치던 나라였음은 우리민족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먼저 그 근거를 삼국접양도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19세기 조선과 연관된 국제사회, 특히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영향을 끼친 가장 큰 사건은 일본의 개항(1854. 3. 31)을 주도한 미국의 활동이었다. 미국의 일본개항 전권을 위임받은 페리제독은 1854년 미?일 화친조약 체결에 따라 그 결과를 미 의회에 1856년 정식보고서로 제출하였다.
이후 페리제독이 남긴 자선전과 당시 항로에 따르면 그는 일본 도착 전 오키나와를 방문하고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3일간 채류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중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항로상에 위치한 이곳을 자국의 영토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페리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 5명을 모두 이주시키고, 섬을 매입한 뒤 본국에 이를 보고하였고, 이 보고서에 의해 미·일 간에는 오가사와라를 사이에 둔 영토분쟁이 일게 된다. 이때 일본이 오가사와라가 본국의 영토임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내세운 것이 바로 임자평(林子平: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통람도설』의 「삼국접양도」였다. 이 책에는 본래 무인도인 섬을 그 발견자 이름을 따 오가사와라 제도라 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어로 적힌 지도는 효력이 없다.
하여 고심하던 중 독일인 클라프로토(Klaproth)가 번역한 『삼국통람도설』 과 「삼국접양도」의 프랑스어 판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1861년 2월과 1862년 4월 일본이 미국에게 ‘삼국통람도설 프랑스어판’에 기록된 오가사와라 라는 지명이 자신들의 조상이름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어 자신들에게 영유권이 있다고 주장, 후일 영토협상에 성공함으로써 ‘삼국통람도설이 국가 간 영토분쟁 시 국제공인자료로써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이 미국, 영국 등 당시 열강의 대사에게 국제공인자료로 제시한 “프랑스어 판 삼국접양도”를 보면 울릉도, 독도는 물론 대마도의 조선령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가사와라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일본이 내세운 지도가 다름 아닌 울릉도, 독도뿐만 아니라 대마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한 클라프로토의 삼국접양도라는 것은 당시 일본이 상정한 일본영토의 경계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앞선 1826년에 클라프로토가 아시아 전체에 대한 설명책자를 발행하면서 함께 더불어 제작한 아시아 전체지도를 살펴보면, 대마도에 대하여 일관성 있게 조선으로 그 소유국을 표기함으로써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1948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한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이승만은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 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외무부를 통해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대한민국의 정부수립과 더불어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첫 연두기자 회견에서 대마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 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세워져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침탈한 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한다.” 라고 요구했다.
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4월 대마도 반환을 재차 요구했지만, 다음해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함으로서 일본은 6.25전쟁이 일본을 살렸다고 한다. 이는 6.25가 경제적인 문제 뿐 만아니라 대마도 반환 문제에서 한국이 생존에 급급한 나머지 관심을 멀어지게 한 결정적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3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피폐해진 국토를 되살리기 위해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민족생존과 번영의 최대 숙제임을 간파한 이승만 대통령이 여기에 집중하게 되면서 대마도문제는 희미해졌지만 기록에 의하면 그 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전까지 주한 외교사절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대마도가 우리 고유 영토임을 역설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외에도 언어학적 연구는 물론 국제법상, 전쟁에 참패한 패전국은 침탈했던 식민지를 자국에 반환하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패망 이후에도 국제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대마도를 실효적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임진왜란의 전리품으로 얻은 땅에서 실효적지배를 이유로 지금까지 자기네 땅이라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 이후 그 어느 누구하나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정식으로 주장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독도나 대마도는 역사적으로나 문헌적으로나 고증학적으로나 우리영토임이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독도수호에 급급한 나머지 “대마도도 우리 땅” 이라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
본디 온순하고 고고한 사슴과 같은 대한민국의 땅 대마도! 그러나 고삐 풀어진 망아지 같이 날뛰는 일본의 쓰시마(대마도의 일본명)가 되어버린 대마도야 말로 위록지마라 일컬을 수 있지 않을까? 참으로 뭍으로 배를 저어가려는 일본의 육지행선(陸地行船)의 무모함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8월 27일
뉴스21 논설위원 이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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