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팽손(1488∼1545, 본관은 제주. 자는 대춘. 호는 학포)은 조광조 등과 함께 사가독서를 하고, 1519년 교리로 재직 중 기묘사화로 삭직되었으나, 1537년 복관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능주의 죽수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에는 《학포유집》이 있다.
양팽손은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대에 문장과 서화로 명성을 얻은 문신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윤두서, 말기의 허련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손꼽히는데, 특히 양팽손은 호남 화단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본관은 제주로 1488년 9월 19일 전남 능성현(현 능주) 월곡리에서 양이하의 아들로 출생하여 1545년 8월 18일 학포당에서 타계했다. 그의 사후 3백년 이상 지난 1863년 혜강이란 시호를 받았으니, ‘부지런하고 사가 없으므로 혜라 하고 연원이 유통하므로 강이라 한다’는 뜻으로 한평생 일관된 삶의 태도와 성품을 잘 대변한다 하겠다. 여섯 살 연상으로 1510년 생원시에 같이 등과한 조광조는 그와 평생 뜻을 같이한 지인인데, 그에 대해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을 초월한 사람’이라 묘사했다. 조광조의 유배당시 곁에서 함께한 이가 학포였고 조광조가 타계하자 학포는 그의 사신을 수습하였다.
조선왕조의 화단에 있어 전과 구별되는 파천황의 새로운 화풍을 이룩한 것은 전문적인 직업화가가 아닌 문인화가들 이었다. 화단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두드러진 이들 지식인 화가들 중에는 당쟁에 연루되어 사대부로서의 정치적 활동이 거세되었기에 서화로 평생을 보낸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양팽손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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