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정치에 입문하면서 목표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밝힌 박 후보는 그 이후 대통령의 꿈을 차근차근 다지기 시작했다. ‘부친의 그늘’에서 대중과 직접 호흡하는 ‘국민의 광장’으로 옮겨 간 그의 정치인생은 도전과 좌절, 재도전의 역사였다.
박 후보의 대통령을 향한 꿈은 2007년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 독자 출마를 저울질하면서 그의 대권 의지는 표면화됐다. 그의 대통령을 향한 꿈은 두 남자에 의해 가로막혔다.
2002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것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한나라당 탈당 후 이 전 총재를 위협할 높은 여론 지지율을 보였지만, 보수 후보 단일화 요구로 지지율이 급감하면서 결국 한나라당에 복당, 이 전 총재를 지원했다.
두번째 대선의 꿈도 비슷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박 후보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이길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국 분루를 삼킨 뒤 이 후보를 지원했다. ‘비운의 공주’였던 그는 정계 입문 후 한 손에는 ‘선거의 여왕’이란 타이틀로, 또 다른 한 손에는 ‘원칙과 신뢰의 리더십’이란 평가를 받으며 지도자로 우뚝 섰다.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는 그의 자서전 제목만큼 그는 절망과 희망을 교차하는 삶을 살아왔다.
1952년 2월 대구에서 태어난 박 후보는 부친인 박 전 대통령이 5·16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에 당선되며 1961년 9세에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파리 유학 시절 모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 퍼스트레이디 대행을 5년간 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러던 중 1979년 10·26 사태로 부친까지 잃었다.
한동안 은둔하던 박 후보는 1998년 국회의원 당선으로 정치 전면에 다시 등장했다. 그는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수수 사건과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로 위기에 처한 당의 ‘구원투수’로서 정치적 입지를 크게 넓혔다. 2004년 3월 당의 위기 속에 대표를 맡은 박 후보는 국민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천막당사’ 등 쇄신안을 통해 한 달 뒤 ‘4·15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개헌 저지선인 121석을 확보, 선거의 여왕이란 이름을 얻었다.
2006년 지방선거 지원유세 때 ‘커터칼 테러’를 당했지만 병원 이송 뒤 첫 마디가 “대전은요?”였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당내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했던 박 후보는 2007년 17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8월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아깝게 져 대권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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