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에 ‘캔디’들이 넘쳐나고 있다. 대박행진중인 SBS ‘파리의 연인’의 김정은을 비롯해 인기리에 종영된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명세빈, ‘황태자의 첫사랑’의 성유리, 심지어 영화 ‘아는 여자’의 이나영 등 최근 인기있는 드라마와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예쁜 척 안하고(실제로도 완벽한 미인은 아니고), 엉뚱하고 깨는 행동방식의, 가식없고 낙천적이며, 섹스어필하기보다는 아이처럼 덜자란 느낌의 귀여운 여자들’이다(‘옥탑방 고양이’의 정다빈,‘명랑소녀 성공기’의 장나라도 이에 해당된다). 좀더 어리버리하고(김정은), 좀더 썰렁하며(이나영), 좀더 악착같다(명세빈)는 변주와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캐릭터들은 일본만화가 창조한 ‘귀여운 여자’의 전형인 ‘캔디’로 좁혀진다.이처럼 캔디들이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엉뚱하고 귀여운 캔디의 반대편에 있는 캐릭터들이 대부분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공주’들이고(이들의 유일한 결점은 성격이 못됐다는 것이다) 그 완벽한 조건들이란 미모, 상류사회의 예의범절, 여성다움 등 전형적 여성성과 동의어라는 점에서, 캔디 캐릭터의 인기는 강요된 획일적 여성성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캔디 캐릭터들이 완벽하기보다는 어리숙하고 다소 모자란 듯한 ‘약자’ 캐릭터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미디어연구가들은 시청자대중은 TV에서 자신보다 지나치게 지적이고 우월한 사람을 보기 원치 않는다고 지적한다. 가령 유재석 김제동 신정환처럼 다소 부족해보이는 인물들을 MC로 선호하는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이처럼 시청자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만만하게(혹은 친근하게)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이 드라마속에서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는 과정을 통한 대리만족 효과도 크다. 또 아이같은 귀여운 캐릭터의 인기는 날로 성숙을 거부하고 심리적 유아기를 연장시키고자 하는 최근 성인문화의 유아화 경향을 반영하기도 한다.이중 ‘파리의 연인’으로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김정은은 최근 캔디형 캐럭터로 가장 흥행에 성공한 케이스다. 김정은은 극중 솔직하고 엉뚱한 성격의 고학생 역으로 재벌2세 박신양과 로맨티스트 이동건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김정은이 연기하는 캔디는 철저하게 남성의 시선에 포박된, 남성의 보호를 기다리는 귀여운 여자라는 한계를 지닌다. 가식없고 털털하며 연적의 공격에도 당당히 맞서고, 연애관계에서도 나름의 능동성을 보이지만 김정은은 유사연애관계인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피보호자 응석받이의 이미지에 갇혀 있다. 김정은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마치 살아있는 그에게 말을 건네듯 음성을 녹음한다. 박신양과 로맨스가 시작된 것도 ‘아버지의 뜻을 좇아’ 파리로 떠났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주연을 맡아 16일 개봉하는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에도 이와 비슷한 설정이 나온다. 김정은은 여기서도 어린시절 아버지와의 행복했던 때를 잊지 못하는 털털하고 가난한 고아처녀로 나오는데 영화의 엔딩은 아버지의 옛집을 다시 사들인 남자친구(김상경)로부터 청혼받는 장면이다. 엉뚱발랄한 캔디 김정은의 로맨스는 아버지를 대체하는 보호자 연인과 가정을 이루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다.데뷔초부터 거침없이 망가져 여배우의 금기를 스스로 깨고 배우의 탈신비화에 앞장서온 김정은은 동시에 ‘CF의 여왕’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며 ‘망가지고 깨는’ 이미지들을 상업적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왔다. ‘파리의 연인’의 김정은은 신데렐라치고는 상당히 깨는 유쾌한 캔디형 신데렐라임에 틀림없지만 결과적으로 보호자 아버지의 대체물 연인을 찾는 응석받이 여자라는, 귀여운 여자에 대한 가장 낡은 이미지에 고착돼 버렸다.이런 김정은의 이미지는 이나영과 확연히 구분된다. ‘네 멋대로 해라’로 쿨한 개인주의자 이미지를 구축한 후 이나영은 ‘영어완전정복’‘아는 여자’에서 엉뚱하고 썰렁한 캐릭터의 매력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영어완전정복’에서는 아예 ‘깨는’ 분장을 하고 나왔다). 최근 대중문화계를 강타하는 만화적 상상력의 표상이기도 한 이나영의 매력은 얼굴은 아주 예쁜데 행동은 보통 미인들이 잘 하지 않는, 혹은 흔히 안예쁜 여자들이 하는 전형적 행동방식을 보이는데서 오는 묘한 균열이다. 이나영은 심지어 아예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듯한 행동방식을 보이기도 한다.엉뚱하고 털털한 캐릭터에 때로는 유아적이고 중성적·탈성적 느낌을 주는 것까지 김정은과 이나영은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김정은은, 이나영이 보여주는 바, 미인(전통적 여성성)과 그렇지 않은 여자 사이의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행동방식의 경계를 허물고 뒤엎는 ‘쿨한 캔디’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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