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 향리의 사숙에서 전통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러던 중 1894년 청일전쟁을 경험하면서 민족실력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특히 1898년 친구의 권유로 기독교에 입교한 후 서구의 신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주에서 근대식 교육기관인 일신학교와 양실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기독교 신앙을 통한 자유와 평등 이념을 전파하면서 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09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정통 신학을 공부하였고, 1915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고 의주동교회의 담임 목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2월 이승훈과 양전백의 권유로 3·1운동 거사 계획에 참여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참여하였다.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고, 선생은 의주에서 대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개최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8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 헌병에 피체 되었다.
피체된 뒤에도 선생은 확고한 신념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옥고를 치른 뒤에도 민족독립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민족교육에 힘쓰는 한편, 의주 동교회와 신의주 백마교회를 중심으로 목회활동과 그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광복의 날을 밝혔다. 그러던 중 건강악화로 1937년 1월 13일, 5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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