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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재입북했다 되돌아온 탈북자가 있다
  • 양길영
  • 등록 2012-11-14 1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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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유골을 위해 월북했던 탈북자
북한정권이 "남조선 정보기관에 속아 탈북했다가 재입북했다."고 주장한 탈북자 인터뷰를  올해 들어 벌써 3번이나 공개했다. 자진입북이라고 하기엔 의심스런 대목이 많은 북한의 선전과 달리 실제로 재입북했다가 한국으로 되돌아온 탈북자가 있다. 뉴포커스는 어렵게 그 주인공을 찾아 인터뷰를 요청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그의 첫 인상은 상상했던 것과 달리 조용하고 어진 성격의 소유자인 듯싶었다.
 
그런 그가 탈북자들이라면 감히 돌아보는 것조차 두려운 북한으로 제 발로 갔다왔다. 고향 사람들 9명과 아버지 유골을 갖고 오기 위해서였다. 그 죄로 그는 이제 며칠 후면 감옥에 가야 할 형편이다. 몇 년 형을 받게 될지는 며칠 내로 법원이 결정하게 된다. 김정만(가명, 나이 51세) 씨는 처음 뉴포커스의 전화를 받고 고민했지만 감옥에 가기 전에 인터뷰를 하기로 결심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요즘 탈북자들이 재입북했다고 북한이 선전하잖아요. 저의 아버지는 죽어서도 한국에 오고 싶어했습니다. 북한은 거짓말 하고 있어요, 그걸 탈북자신문인 뉴포커스에 말하고 싶어 사무실로 찾아온 겁니다."

2006년 9월 4일 북한을 탈북한 김정만 씨는 약 보름간 중국에 머물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현재 일산의 물류택배 회사를 다니며 성실한 한 가정의 아버지로 살던 그가 왜 결단코 두만강 북한지역을 밟았다 다시 돌아왔는지 그와 나눈 이야기를 요약해 보았다.
 
당신은 북한에 2번이나 간 셈이다. 북한 식으로 표현한다면 재입북인 셈이다. 당신은 위법인 줄 몰랐다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는 북한 땅을 밟지 않았다. 그냥 두만강에 들어섰을 뿐이다. 내가 북한에 있을 당시 중국 관광보트가 북한 근처까지 자주 접근하는 걸 봐와서 넘어가도 죄가 되지 않는 걸로 생각했다. 한마디로 강물 위에는 국경이 없는 줄 알았다. 북한 땅만 짚지 않으면 괜찮은 줄로 알았다. 2009년에는 아내와 딸을 탈북시키기 위해 브로커비용을 아끼려고 내가 직접 두만강에 갔었다. 강 근처에서 직접 만나 가족 모두를 데려오기까지 했다. 중국 쪽에 밧줄을 고정한 후 내 몸에 묶고 헤엄쳐서 북한 쪽까지 간 후 줄을 넘겨줬었다. 그리고 작년 7월에는 아버지 유골을 가져오려고 갔었다. 미리 친구에게 전화로 부탁까지 해서 유골을 두만강까지 가져와달라고 했는데 만나지 못했다. 
 
무섭지 않았나? 만약 북한 군인들이 당신을 강에서 끌어냈다면 그때는 당신도 재입북 선전원이 되어 기자회견장에 섰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은 못해봤었나?
 
미리 그 쪽(북한)에 전화를 했었기 때문에 북한 쪽은 무섭지 않았다. 그들이 날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조금 무서웠던 것은 오히려 중국 변방대원들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한국여권이 있어서 배짱이 있었다. 나는 한국인, 그 생각이 나를 오로지 그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한 일념에만 집중하게 해줬다. ?
 
처음에는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굳이 아버지 유골을 가지러 다시 갔던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아버지의 고향이 경남 합천군 가해면 오도리이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내게 세뇌하듯 나의 고향이 남한이라며 고향 주소를 자주 언급하시곤 하셨다. 살아선 힘드니 죽어서 통일되면 고향 땅에 묻어달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15살에 돌아가셨는데 비록 어렸지만, 가슴속에 깊이 새겨두었었다. 어릴 때 기억이 더 진한 법이다. 산 사람들을 데려오고 나니 죽은 아버지 얼굴이 자꾸 꿈에 보였다. 한국에서 더운 밥을 먹을 때마다 아버지 유언이 계속 가슴에 걸렸다. 그래서 탈북을 하기 전 언젠가는 아버지 유골을 가지러 다시 오겠다며 믿을만한 동네 친구에게 아버지 묘를 파기 쉽도록 얕게 가묘로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마침 아는 분이 자기 가족을 데려오게 해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여비가 생겨 결심하게 됐다.
 
아버지 고향이 남쪽인데 왜 북한으로 가셨고, 남한 태생으로서 북한에서의 삶은 어떠했는가?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셨던 아버지가 해방 후 소련에 머물다 60년대 초반 남한행을 원했지만 소련이 당시 국교를 맺고 있던 북한으로  보냈다.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100세가 넘으신다. 나를 50 넘어 낳으셨다. 출신성분 탓에 나는 군대도 가지 못하고 대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탄광에서 국군포로들과 같이 노동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일제 징용이 더 편하고 사람다웠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탄은 겉이 시커멓지만 속은 뜨겁다. 나는 그렇게 악으로 살아왔다. 시커멓게 살면서 늘 탈북결심 하나로 버텨왔었다.
 
아버지 유골은 모셔오지 못했지만 이번에 직접 두만강까지 가서 9명을 탈북시켰다고 하던데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두만강까지 갔었나?

맹세컨대 돈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잘 알던 고향사람들인데다 그 중 한명이 아버지 유골을 갖고 오기로 돼 있었다. 원래 계획은 서너 명 정도였는데 막상 가보니 예상보다 많은 9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북한에서 고생하는 이들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사비를 털어 구명조끼와 밧줄을 구매해서 결국 탈북 시킬 수 있었다. 아버지 유골을 파오기로 했던 친구는 사정이 생겨 오지 못했다. 그래서 9명을 중국 브로커에 인계한 후 나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아내를 탈북시킬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왜 이번에는 문제가 되어 실형 위기에 놓인 것인가?
 
아버지 유골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절차를 밟던 중 내가 출국정지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알아보니 원주 경찰서에서 그런 조치를 취했다더라. 나는 양천구에서 살고 있기 때무에 원주 경찰서랑 아무 상관이 없다. 나의 행적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흘린 말을 아마 원주경찰서 보안경찰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 같다. 얼마 전 원주 검찰에 다녀왔다. 월북 의도가 전혀 없었고, 그 증거가 고향 사람들을 데려온 것이라고 했다. 또 중국에 갈 때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간다고 했고, 갔다와서도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도 원주에선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 감옥에 있을 각오를 하라고 하더라. 나의 담당 경찰서에서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은 걸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원주경찰서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주변에선 실적 때문이라고 말을 하더라.
 
이런 상황에 놓이다 보니 혹시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고 있지는 않은가?
 
길어야 1 년 감옥에 있을 텐데 그 세월과 아버지의 소원을 맞바꾸었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렇게라도 아버지에게 위안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 하나 안타까운 점은 그동안 한국에서 막노동하며 지내다 얼마 전 운전을 배워 힘들게 자리 잡은 택배 직장 일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아직 자동차 할부금도 다 갚지 못했다. 감옥에 갔다 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딸 셋을 두고 생활해야 할 아내에게도 미안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북한에 있을 때도 가보지 않았던 감옥을 남한에 와서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하다. 단지 한국에서 가족과 같이 살고 싶었고 아버지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유해를 가져오려 목숨을 걸고 강물에 뛰어든 것뿐이다. 북한에 이로운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동네 사람들 여럿이 탈북하여 우리 동네 보위원이 처벌받았다고 한다. 월북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검찰에서 실랑이를 했는데 결국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처를 해준다면 다시는 북한쪽에 갈 일도 없다.
 
부모님의 유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민족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또 유골이 되어서라도 고향으로 오고 싶어했던 그 유언이 아직 땅에 묻혀 울고 있는 이런 분단국가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김정만 씨는 검찰의 그 어떤 결정도 받아들일 마음 속 준비가 돼 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 안보를 위해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 개개인의 모든 사정까지 봐 줄 수 없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 이후 웃음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서는 그에게 다른 기자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부탁했다. 한번 안아보고 싶다고 말이다.   뉴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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