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5일 세종문화회관, 9월29일 영등포역, 10월25일 국방부 앞. 이곳에서는 검정제복을 입은 수백명의 사나이들이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실체인정에 대해 목이터져라 외쳐대고 있었다. 과연 이들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나가 되어 끝도 기약되지 않은 싸움을 계속 하는 것일까?
숨겨져야만 했던 사실, 또 여전히 숨겨진 사실들을 이제는 밝혀야만 한다는 그들. 그들의 이름은 바로 ′북파공작원′들이다.
북한의 ′대남간첩′ 얘기를 들으며 반공 의식을 키웠던 우리 국민들에게는 다소 생소함으로 다가왔던 ′북파공작원′들이지만 그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50년대부터 이미 존재해 왔다. 지난 10월 22일, MBC ′PD수첩′은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라는 타이틀 아래 북파공작원들의 증언들을 근거로 그들의 실체에 대해 방영했다. 북파공작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은 인간이 아닌 병기로 키워졌고, 그 훈련은 너무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훈련중 도태되거나 조금이라도 이탈된 행동을 한 사람은 ′망치, 도끼, 해머, 돌 등′으로 어김없이 무시무시한 구타를 당해야 했고, 또 형제처럼 지내던 동요일지라도 탈출을 시도하다 잡힌 사람은 어쩔수 없이 서로 짓밟고 때려야만 했다.
군 입대 당시 "제대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 "국가 첩보원으로 최고대우를 해주겠다"는 물색관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지원을 하게된 북파 공작원이었지만 지원 후에 벌어지는 상황과 제대후에 이어지는 일들은 그들이 들었던 명예의 국가비밀첩보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사회의 낙오자, 이탈자라는 꼬리표만 붙게 만드는 경력이 됐을 뿐이었다.
북파공작원 UDU 해군 첩보원 회장 김종도 씨도 "30년간 군생활을 했지만 전역 후 남은 것은 ′병역미필자′라는 오명뿐"이라며 비통해 했다.
지금 북파 공작원들은 혹독한 훈련에 견디지 못해 탈출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 또 북한 첩보원으로 보내졌지만 현재 생사여부조차 확인할 수도 없는 사람들, 혹독한 훈련의 영향으로 병든 몸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런 동료와 유가족들을 지켜보며 가슴으로 울어야 하는 사람들로 남아 자신들의 실체인정과 그와 관련된 국가의 선처를 기다리고 있다.
정부는 이에 지난 10월24일 "7.4 공동성명 이전에 활동한 요원의 경우, 월급 160만원에 평균 복무기간 16개월을 곱한 금액과 10년치 국민기초 생활보장금을 합한 4552만원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6.25전쟁(51-53년), 휴전후 준전시(53~59년), 7.4 공동성명 이전까지의 비전시(60-72년), 안보대비양성기간(68-94년) 등으로 대상을 나눠 보상금을 차등 지급하는 보상안에 따라 정해진 결정이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의 보상금 지급안은 ′대한민국 HID 북파공작 설악동지회′에 의해 전면 거부되었다. "북파공작원들에 대한 실체인정과 명예회복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일방적인 책정"이라는 이유다.
현재에도 매년 육군 HID 150명, 해군 UDU 15명들씩 양성되고 있는 북파공작원들.
과거 군사시절보다는 훨씬 처우가 개선됐다는 관계자의 말이지만 아직도 과거 피해 북파공작원들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0월 25일, 국방부 앞에는 UDU 대원들이 주축이 된 200여명의 북파공작원 동지회 회원들이 원래의 계획대로 모였다. 구속자 석방과 자신들의 실체인정에 대해 요구하는 집회였다. 이날은 폭력시위가 아닌 평화적 시위로 자신들의 심정을 토로했으며 그 유가족들은 삭발식을 감행했다.
′생존자 명예회복′과 ′국가유공자 인정′, ′충은탑 건립′에 이어 "구속동지 석방"이라는 하나의 안이 더 늘어난 것이 그들의 요구안이었다.
′국군의 날′,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고사하고 병역미필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비통한 심정이 아직도 메아리로 들려온다. 머리를 삭발하면서까지 북파공작원의 고통을 대변하는 유가족 여인네들의 눈물이 그들 존재에 대한 보상의 씨앗이 되길 바란다.
권경희 기자 kkh@krnews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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