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M-A-S-H', '내시빌', '더 플레이어'등에서 할리우드에 대한 신랄하고 불경한 풍자를 묘사했던 로버트 알트만 감독이 81세로 별세했다. 알트만 감독은 20일(현지시간) 밤 LA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알트만감독 소유의 샌드캐슬5 프로덕션의 프로듀서인 죠슈아 아스트라찬이 AP통신에 밝혔다. 사망 원인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이날 늦게 보도자료가 배포될 예정이라고 아스트라찬은 말했다. 2001년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를 포함,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5번 올랐던 알트만 감독은 2006년 드디어 아카데미상을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알트만은 당시 수상 소감에서 "어떤 영화 감독도 나보다 더 잘 흔들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경력에 있어 아주 행운아였다. 나는 결코 내가 선택하지 않았거나 개발하지 않은 영화를 감독한 적이 없다. 영화에 대한 내 사랑은 나에게 세상과 인간 조건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알트만의 마지막 작품인 '프레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에 출연한 개리슨 케일러는 21일 알트만의 영화 사랑은 세트를 통해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알트만감독은 영화 만들기를 사랑했다. 그는 촬영의 혼돈과 배우, 스태프들의 사교성을 사랑했다. 그는 배우들과 편집실을 사랑했으며 특히 스크리닝 룸에 앉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고 또 보길 좋아했다." "그는 영화로 인한 돈벌이를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고 인기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일할 때 천국에 있었다." 영화 'M-A-S-H'에 출연했던 엘리오트 고울드는 알트만의 유산이 '영화감독들과 차세대 아티스트들에게 양분과 영감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존 포드 전통의 마지막 위대한 미국 감독이었다"고 고울드는 말했다. "그는 내 친구였고 나는 언제나 그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와 경험을 가졌던 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알트만은 근대 영화 감독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스타일리스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종종 거대한 앙상블 캐스트를 고용했고 즉흥성을 고무하고 대화를 겹치고 캐릭터와 캐리터로 날아가는 롱 트래킹 샷으로 장면을 찍었다. 관객과 비평가들의 찬사와 비난을 끊임없이 오가며 알트만 감독은 지난 1970년 첫 명성을 얻은 反戰 블랙 코미디인 'M-A-S-H'이래 끊임없이 일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 다시 히트작으로 기염을 토하기 전 수년간 애매한 영화들을 감독하기도 했다. 1998년 '진저브래드 맨'(Gingerbread Man), 1999년 '쿠키스 포천'(Cookie's Forturne), 2000년 '닥터 T와 여성들'(Dr. T&the Women)등 일련의 실패작을 거쳐 지난 2001년 영국에 대한 미국의 냉소주의를 다룬 수작 '고스포드 파크'를 세상에 내놨다. 1930년대 영국 영지에서 사교계 명사들과 그 하인들 간에 계급 갈등 풍자와 살인 미스테리가 얽힌 이 영화는 ' M-A-S-H'이후 최대 흥행작이 되었다. '고스포드 파크'는 알트만에게 최고 감독상의 영예를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작품상, 헬렌 미렌과 매기 스미스가 여우 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아카데미상 6개 부문에 올랐으며 극본상을 수상했다. 알트만은 이 영화로 골든 글로브 감독상을 수상했다. 알트만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려놨던 또다른 영화는 'M-A-S-H', 컨트리 뮤직 이야기인 '내시빌'(1975), 영화산업 풍자극인 '더 플레이어'(1992), 앙상블 캐릭터 연구작인 '숏 컷'(Short Cut:1993) 등이다. 그는 '내시빌'로 최고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알트만처럼 5회나 감독상 후보에 오른 영화 감독들은 알프레드 히치콕, 마틴 스콜세지, 클레런스 브라운, 킹 비도르 등 4명뿐이다. 알트만 감독은 지난 5월 소탈한 뮤직컬 쇼 진행자인 케일러와 함께 신작 '프레이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을 내놨다. 출연 배우들은 메릴 스트립, 릴리 톰린, 케빈 클라인, 우디 해럴슨, 토미 리 존스 등이었다. 알트만은 5월 3일 케일러와 다른 배우들과 함께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이 영화는 죽음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종 다른 시각으로 할리우드 장르를 묘사했는데 예를 들면 1971년 서부 영화 영웅을 탈 로맨틱화시킨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1976년작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또는 알트만은 수년간 TV, 광고, 산업 영화 및 주목받지 못한 몇몇 영화 감독끝에 내놓은 'M-A-S-H'로 첫 성공을 거뒀다. 영화는 한국전을 배경으로 도널드 서덜랜드와 고울드를 출연시켰지만 이 영화는 베트남전을 간접 비난한 영화였다. 알트만은 지난 2001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제작사측이 그에게 영화무대를 한국으로 설정한 것을 부인하라고 시켰다며 "그것은 전적으로 내 의도였다. 만약 그 영화를 봤다면 어떤 전쟁인지에 대해 언급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명령은 악취미다. 만약 어떤 이가 최악의 취향에 대해 농담했다면 그 영화에 참가하는 게 나은 기회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전쟁 자체보다 악취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알트만은 말했다. 그 영화는 앨런 알다가 출연한 장기 TV 시트콤을 낳았다. 알트만은 '그 시리즈'라며 불쾌감을 표현하곤 했다. 영화의 사회적 메시지와 달리 TV 시리즈는 탐욕을 유발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들은 매주 일요일밤 미국인의 가정에 아시아 전쟁을 가져옴으로써 수백만 달러를 벌고 있다. 나는 그게 최악의 취미라고 생각한다". 알트만은 할리우드에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9.11 테러 이후 그는 할리우드가 폭력적 액션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테러리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그런 것을 보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극악 무도한 짓을 저질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스튜디오 행정가로서는 잔소리가 심했던 반면 배우들에게는 최고의 존중으로 대했다. 그는 '고스포드 파크'에서 배우들을 위해 라이트를 껐다 켰다 했다. 그 존중은 상호적이었다. 최고급 배우들은 그의 영화에 단역이라도 비추곤 했다. 알트만은 일반적으로 언제나 저예산으로 작업하곤 했는데 배우들은 보통 받던 액수와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출연료를 받고도 그의 영화에 기꺼이 출연했다. 1970년대 중반 알트만 영화의 질이 점차 이상해졌다. 그는 로빈 윌리엄스와 함께 1980년작 '뽀빠이'를 찍었는데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고 알트만은 잠깐 영화에서 손을 뗐다. 그는 브로드웨이 연극 '컴 백 투 더 파이브&다임, 지미 딘, 지미 딘'(Come Back to the Five and Dime, Jimmy Dean, Jimmy Dean)을 감독하고 1982년 영화화했다. 알트만은 수십년간 극장 영화와 TV를 오갔지만 1990년대 '빈센트와 테오'같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영화들은 아직도 많이 상연되지 않았다. '더 플레이어'. '숏컷'은 알트만의 명성과 상업적 가능성을 다시 세워 줬다. 그러나 패션 산업 풍자극인 '기성복'(Ready to Wear), '캔자스 시티'(Kansas City)같은 영화는 그저 그랬다. '캔자스 시티'는 1930년대 재즈 공상과 고향 마을의 갱들에 관한 영화였다. 1925년 2월 20일 태어난 알트만은 10대 시절을 미주리주 캔자스 시티의 재즈 클럽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보험 설계사였다. 알트만은 2차 대전 당시 폭탄 파일럿이었으며 캔자스 시티에서 산업 영화 제작 일자리를 얻기 전까지 콜롬비아의 미주리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그는 1957년 '범법자들'(The Delinquents)이란 영화를 첫 감독했으며 1960년대 중반 TV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당시 제작한 TV물에는 '보난자'(Bonanaza), '알프레드 히치콕 프레젠트'(Alfred Hitchcock Presents)등이다. 알트만과 세번째 부인 캐스린 사이에는 로버트와 매튜 등 두 아들과 딸 크리스틴이 있으며 이전 부인에게서 태어난 마이클과 스테픈 등 또다른 아들 둘이 있다. 그는 2006년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 그는 10여년전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나는 그게 큰 비밀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아무도 나를 다시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심장 이식수술에는 큰 상처가 있고 우리들 가운데 많은 이들도 그런 것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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