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레 케르테스 지음/ 정진석 번역 / 다른우리 / 8,500
여기 한 사람이 있다. 20세기 인류 최대의 만행이라는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지금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묻고 있다. 그의 몸 속 세포 하나 하나엔 아우슈비츠의 체험이 지울 수 없는 경악과 충격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세계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우슈비츠의 만행을 주도한 나치가 사라졌다고 해서 평화가 찾아왔는가? 인류는 홀로코스트가 자행되었을 때 경악했다. 찬란한 인간 이성의 토대 위에 건설된 문명 세계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쉽게 해답을 찾았다. 나치라는 거악(巨惡)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천인공노할 나치 집단의 책임이고, 그 거악을 선의 이름으로 심판하면 모든 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리라 믿었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쉬운 답이 어디 있겠는가? 원래 인간은 단순하고 편안한 것을 좋아한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붙들고 늘어지기보다는 누가 쉽게 설명을 해주길 바라고, 그 설명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싶어한다. 이럴 때 선악의 구분에 따른 해석만큼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 만행은 모두 악의 소행이고, 우린 아무 잘못이 없다. 그 악만 처단하면 세상은 다시 평화로워진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으로 사람들은 인간끼리 저지른 야만을 쉽사리 잊고 쉽사리 위안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케르테스는 『기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만행은 우리에게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로 간’ 것이라고. 그러기에 아우슈비츠에서도 행복을 느꼈다는 말로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왜 불편하게 느끼는지를 스스로 되묻게 하고 있다.지금 이 순간 주위를 되돌아보자. 선의 이름으로, 선으로 포장된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야만적인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는가? 전쟁과 학살과 기아가 끊이질 않고, 이 순간에도 선악의 이분법에 따라 또다시 만행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시대를 향해 작가는 분명한 목소리로 외친다. 아우슈비츠의 원인은 선악의 이분법적 분석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고, 현재도 아우슈비츠의 상황은 끝나지 않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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