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일평 선생은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남평을 본관으로 하는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상당한 재력을 지녔던 가문의 외아들이었던 선생은 18세가 되던 1905년까지 의주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선생은 메이지학원 중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의 임원으로 기관지 「태극학보」에도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1910년 3월 귀국한 선생은 안창호 선생와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에 동참하였다. 이듬해 봄 선생은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학계보」를 편집하고 김성수·안재홍·송진우 등과 교유했다. 1912년 말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상해에서 신규식이 주도하던 독립운동단체 동제사에 참여하면서 동제사에서 설립한 박달학원의 교사로도 활약했다. 상해에서 박은식·신채호와의 만남은 선생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에 3·1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3월 12일 서울 보신각에서 시위군중 앞에서 낭독하다가 체포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출옥한 선생은 중동학교와 송도고보, 배재고보, 중앙고보 등 여러 학교에서 역사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노동대회 교육부장, 신간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간사,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등으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1933년 4월부터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재직한 선생은 ‘조선심’과 ‘조선정신’을 강조, 민족주의역사학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1934년 5월에는 일제의 식민사학에 맞서 실증적 학풍을 주장하면서 진단학회가 창립되자 이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선생은 1939년 4월 3일에 향년 52세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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