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선생은 조선조 말기인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인환(寅煥), 자(字)는 승훈(昇薰), 호(號)는 남강(南岡)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시 기독교측 대표였던 이승훈은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본 관헌에게 검거되어 수감되었다. 이승훈은 대표들 중 최고형인 3년형을 언도 받아 3번째의 옥고를 치르다 59세에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과 관계자 15인등 48명중 마지막으로 경성 감옥에서 가출옥한 후, 곧 이상재, 유진태 등과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여 전국의 사학교육을 지도하는 등 계속 그의 뜻을 펴 나갔다.
1924년 이승훈은 희갑을 맞아 이때부터 그는 한층 성숙되고 깊이 있는 민족정신으로 일하였는데, 5월에는 동아일보의 제4대 사장이 되어 친일세력에 맞서 민족의 언론창달에 힘썼으며,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여 국내외 투쟁에 앞장서서 일하기도 하였다. 이승훈은 민족의 존경과 염원에도 불구하고 여러해의 옥고와 힘든 생활로 인해 강인하던 체력이 쇠잔되어 마침내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그의 생을 마치고 말았다. 이승훈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주었으며 오산학교에서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하였다. 그는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유언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은 세 번에 걸친 9년간의 옥고와 시대의 여러 어려운 일들을 감수하면서도 오직 민족의 독립과 영광을 위해 생을 바친 분이다. 그의 생을 나타내는데 ′무조건 나라를 사랑하였고 무조건 백성을 사랑하였다′는 표현 외에 더 의미가 있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말보다 행동이 앞선 실천의 사람이요, 행동의 애국자요, 의(義)의 신앙인이요, 솔선수범한 교육자 이승훈선생!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계승해야 할 덕목이며 영원토록 후세에 본보기가 될 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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