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배우는 좋은 작품에서 탄생하지만 좋은 배우는 어떤 작품에서도 기본은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혜수(34)는 분명 좋은 배우다. 지난 85년 데뷔 이후 20년 가까이 내내 톱스타였던 그는 반면에 선뜻 대표작이 떠오르지 않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가 오로지 자신의 취향과 의지대로 골랐다는 영화 ‘얼굴없는 미녀’는 더이상 그냥 ‘좋은 배우’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김혜수의 도전처럼 느껴진다. 장대비가 퍼부었던 지난 16일 저녁 서울 강남의 사진작가 박상훈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직 베일에 싸여있는 영화 ‘얼굴없는 미녀’의 실체는 더욱 모호해졌지만 그만큼 배우 김혜수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할까 말까’ 망설임의 연속다음달 6일 개봉예정인 ‘얼굴없는 미녀’는 경계선 성격장애를 앓는 유부녀 지수(김혜수)와 정신과 전문의 석원(김태우)의 기묘한 사랑을 그린 미스터리멜로. 데뷔작 ‘로드무비’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던 김인식 감독의 두번째 장편영화다.처음 ‘김인식 감독의 시나리오가 왔다’는 매니저의 말에 그는 대뜸 ‘한다고 말해’라며 덮어놓고 오케이 사인을 냈다. 그러나 호쾌한 시작과 달리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까지는 오랜 망설임의 시간을 거쳤다. “개인적으로 ‘로드무비’가 너무 좋아서 김인식 감독에게 관심을 가졌죠. 사람들은 동성애 영화라고들 하지만 제가 볼때 ‘로드 무비’는 자살이라는 대단히 무겁고 위험한 소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룬 수작이에요. 그런데 정작 ‘얼굴없는 미녀’시나리오를 받아들고 보니 단번에 필이 오는 게 아니어서 곤혹스러웠죠. 욕심은 나고, 자신은 없고, 배우로서의 재능까지 회의하면서 ‘해, 말아’ 거듭 고민했어요.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다음에도 ‘실수한 것 아닐까’ 싶어 만약 계약을 파기하면 얼마나 물어야 되나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기도 했다니까요.”발산하는 캐릭터, 감추는 연기‘얼굴없는 미녀’에서의 지수가 어떤 인물이기에 명민하고 당차기로 소문난 김혜수를 우울증의 함정에 빠뜨렸을까. “성격장애 캐릭터라는게 말하자면 미친년이죠. 발산할 게 많아 배우로서는 활동반경이 넓고, 강렬한 만큼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쉬울 수 있죠. 하지만 감독의 주문은 ‘최대한 건조하게’였고,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이 쉽지 않은 숙제였어요.”쉽사리 종잡기 어려운 지수에 대한 그의 인상은 한마디로 ‘슬프다’는 것. “‘사는 일이 슬프잖아요. 산다는 게 기쁨은 잠깐이고, 슬픈 일 투성이니까요. 대놓고 울리는 건 싫지만 생각해보면 전 항상 슬픈 느낌이 저변에 깔려 있는 인물이나 영화에 매력을 느껴 왔어요. 지수는 아주 복잡하게 슬픈 캐릭터예요.”‘데뷔 20년만의 파격노출’ 등 김혜수의 전라 베드신이 화제에 오르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담담했다. “벗는 연기만으로도 신경 쓰이는 일이었지만 더 어려웠던 것은 최면상태에서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 선 사랑을 묘사하는 일이었어요. 일단 영화를 보시면 단지 노출 수위말고 더 궁금한 게 생기실 거예요. 지수의 과거와 현재, 그 내면의 복잡한 공기 같은 것들요.”김혜수에 대한 오해 또는 이해여신으로 치면 아프로디테보다는 헤라가 더 좋다는 김혜수. 뭐든지 조금 해도 항상 더 세어 보이는 까닭에 기(운) 센 배우로 알려져 있지만 15년 키운 개가 죽었을 때 그냥 눈물만 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갈빗대가 저리도록 아팠다는, 한없이 여린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저를 둘러싼 오해들요? 화려하다, 강하다, 도도하다, 똑똑하다, 잘 놀 것 같다, 뭐 대충 이런 것 아닐까요. 어떤 면에서 화려한 건 사실이지만 화려하기만 한 건 아닌데, 멍청한 배우보다는 낫지만 똑똑한 배우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배우는 어차피 만들어지는 사람이니까 그런 저런 오해들은 그냥 그러려니 해요.”좋은 배우라는 칭찬은 냉정하게 말해 최고의 배우는 아니라는 평가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김혜수, 혹독한 망설임 끝에 선택한 ‘얼굴없는 미녀’에서 그가 보여줄 ‘편견없는 배우’의 모습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