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포용(包容)과 관용(寬容)이란 말이 있다. 두 가지가 비슷한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포용은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이라 쓰여 있고, 관용은 ‘아량 있고 너그럽게 감싸 받아들이다’ 로 되어 있다. 다만 포용은 ‘용서(容恕)’에, 관용은 ‘아량(雅量)’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 알다시피 포용이란 타인을 너그럽게 감싸주거나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감싸주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활발한 사회생활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포용력이다. 사람들이 모든 일을 잘할 수만은 없다. 또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 언제나 질책만을 가한다면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 종종 질책보다 넓은 아량과 수용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살다보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내 생각에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 같은 사람도 있다. 이럴 때 터무니없는 의견이라며 무시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듣고 자신에게 고칠 점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특히 많은 직원들을 거느리는 CEO들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포용력이다. 워낙 다양한 직원들이 있다 보니 갈피를 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어떤 직원은 직설적으로 말해도 상처받지 않고 잘 알아듣는 반면에 어떤 직원은 살살 돌려서 말해야 하는 직원도 있다. 그래서 기업의 대표로 10년만 일해도 사람의 성품과 관상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게 된다고들 했던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라는 시리즈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개방성과 포용성이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평가했다. 유럽이 정치 무대를 이민자에게 개방하게 된 것도 고대 로마제국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셈이다. 지중해 일대를 장악한 로마제국은 식민지 주민 가운데 능력 있는 사람을 로마 지배 계층으로 적극 포용했던 것이다. 심지어 로마의 5현제(賢帝)의 한 사람인 트라야누스는 식민지 스페인 출신이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 주민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포용정책이 얼마나 현실적이었으면 로마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그 누구도 이방인이 아니다"는 속담까지 생겼겠는가.
그런데 포용이라는 영어 톨로런스(tolerance)는 ‘인내’라는 뜻으로도 함께 쓰인다. 사실 인내가 없는 포용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포용한다는 그 자체가 뜻이 일치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뜻이 맞지 않는데 어떻게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바로 포용의 미덕이 숨어 있다. 포용은 단순하게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일단은 상대방의 생각과 태도를 존중해 준다. 사람은 심리적으로 나를 먼저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좋은 태도를 보이게 마련이다. 소위 말하는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상대방을 밀쳐 내면서 내 뜻만은 인정해 달라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갈등의 시발점이다. 그래서 큰 그릇이 되려면 먼저 포용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포용력의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편견이다. 내가 가진 잣대로 다른 사람의 성격과 태도, 행동 등을 재다 보면 끝이 없는 법이다. 편견이라고 하는 색안경을 벗고 생각의 폭을 좀 더 넓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포용력을 갖출 때 쓸데없이 낭비되는 마음의 에너지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