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획 '대외원조 사업현장을 찾아서] 라오스
1. 1968년 충남. 21살 청년 이상수씨는 보건직 공무원이 됐다. 첫 근무지는 금산군 보건소, 주 임무는 전염병 예방사업이었다. 이 씨는 마을 주민의 채변을 걷어 기생충을 검사했다. 검사 결과 회충 감염률이 50%를 웃돌았다.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채 100달러에도 못 미칠 때였다. 특히 금강 상류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날로 먹으면서 주민 중에는 간디스토마 환자도 많았다. 주민에게 산토닌을 나눠주고 일일이 변을 확인했다. 산토닌을 먹으면 어질어질하고 하늘이 노랗게 보이지만 아이와 주민들은 어김없이 하얀 회충을 변으로 쏟아냈다. 이렇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상수씨는 30년을 공직에서 일했다. 강산도 3번 넘게 변했을 사이 우리나라에서 회충 보균자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이 씨도 가정·경제·지위·경륜·사람관계 모든 것이 안정돼 한눈팔지 않아도 인생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 씨는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섰다. 정년도 많이 남았지만 후배들에게 아쉬움 없이 물려줬다. 2006년. 지금 이상수씨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봉사단원이다.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 와따이 공항에서 쌍발기로 갈아타고 한 시간 가량을 북쪽으로 날아가면 라오스의 고도(古都) 루왕프라방. 여기서 다시 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흙먼지를 헤치고 가면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빡깽 마을이 길 양편으로 나타난다. 30년전 내가 살던 그모습 그대로이상수 단원은 2004년 루왕프라방주 말라리아센터에 부임한 뒤 빡깽 마을에서 주민 채변 검사를 하고 깜짝 놀랐다. 주민 1000여 명 가운데 92.6%가 감염자였다. 특히 메콩강의 민물게를 먹은 주민 중에는 폐디스토마 환자도 발견됐다. 라오스의 1인당 국민소득(GNI)는 340달러(2003년), 빡깽 마을은 채 100달러도 안된다. 이상수 단원에게 30여 년의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 이상수 단원은 이듬해 빡깽 마을을 시범보건지역으로 지정하고 봉사단원으로 '기생충 퇴치작업' 프로젝트팀을 꾸렸다. 이상수 단원 이외에도 간호사 임영미 단원과 관개수리를 담당할 이충헌 단원이 투입됐다. 기생충 약만으로 기생충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은 이미 한국에서 30년 전에 겪은 일. 우선 깨끗한 물이 필요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충헌 단원이 인공적인 동력 없이 쓸 수 있도록 마을 뒷산에서 깨끗한 물을 마을로 끌어왔다. 풀숲에서 용변을 보지 않도록 화장실도 손을 봤다. 임영미 단원은 마을 사람을 모아 양치질부터 손 닦기, 음식조리까지 기생충을 없애는 보건교육을 벌였다. 이상수 단원이 일하던 충남도청에서는 지역 약사회와 함께 기생충 약과 채변통, 컴퓨터 등을 보내왔다. 빡깽 마을에는 KOICA의 '소득증대팀'도 투입됐다. 대학 재학 중에 봉사단원으로 파견된 박두영, 정진묘, 박소희, 조교희 단원이 마을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경제적인 기반을 닦고 있다. 박두영 단원은 틸라피아(역돔), 조교희 단원은 메기 양식장을 지어 마을 주민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닦고, 정진묘 단원은 버섯재배, 박소현 단원은 고추, 오이 등 작물재배 터전을 일군다. 마을 사람들도 팔을 걷고 나섰다. 봉사단이 떠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방적으로 주는' 원조 사업과 다른 모습이다. 집집이 일꾼을 뽑아 흙을 지고, 벽돌을 날랐다. 마을 사람들은 봉사단원과 함께 농장을 일구고, 양식장을 만들었다. 또 연일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어떻게 가꿔가고, 소득을 나눌지를 논의했다. 라오스판 새마을 운동 시범마을 빡깽이상수 단원은 "빡깽 마을을 1970년대 우리의 새마을처럼 KOICA 시범마을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주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긴다는 것이다. 그 자신감과 함께 이상수 단원도 30의 세월에 흘려보냈던 희망을 다시 본다. #2.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에 있는 한(국)-라(오스) 직업훈련원에서 만난 '타위숙'(33세)씨. 집은 비엔티엔에서 380Km 떨어진 '던티아오느아'다. 20살 난 부인 캄펀과 라오스에서 아셈회의가 열리던 2004년에 낳은 아들 '아시안'은 고향에 있다. 타위숙씨는 지난해 11월부터 한-라 직업훈련원에서 분해된 TV와 씨름을 하고 있다. 아들 '아시안'이 '빠빠!', '퍼~'(아빠) 하며 한창 재롱을 부릴 때지만 전자제품수리센터를 차릴 수 있다는 꿈에 애틋한 시간은 잠시 미뤘다. 타위숙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깨너머로 에어컨 수리를 배웠다. 그동안 근근이 먹고는 살았지만 아이가 커가면서 기술을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타위숙씨는 "실물을 놓고 배우니까 가게를 열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젊은 사람들과 배우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지만 참고 이겨나간다"고 말했다. 또 한-라 직업훈련원의 졸업장을 내걸면 손님도 끌고 믿음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라 직업훈련원 재봉과의 짠타북파(27세)는 어머니의 재봉 일을 돕다 지난해 한-라 직업훈련원을 찾았다. 재봉틀의 바늘처럼 한땀한땀 엮어가는 그녀의 꿈은 의상실 주인이다. 짠타북파는 지난해 말 바다색 천으로 어머니와 선생님의 ‘씬’(라오스식 치마)을 만들어 준 일이 너무나 흐뭇하다. "영어와 컴퓨터를 배우는 다른 친구들은 실제 업무를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여기는 배우고 나서 바로 일할 수 있으니까 부러워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또 기술은 죽을 때까지 갖고 있는 자산"이라고 자랑했다. 컴퓨터과 교사인 '다자완'(25세)씨는 우리나라의 서울대에 해당하는 라오스 '동독대'를 졸업한 재원이다. 컴퓨터를 전공하고, 영어도 수준급이어서 월급이 많은 외국기업에도 취직할 수 있었지만 한-라 직업훈련원에서 교사를 모집한다는 것을 보고 주저 없이 지원했다. 한국의 지원으로 건물과 기자재가 갖춰진 직업훈련원에서 라오스의 미래를 일굴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수입하던 기능인력 한-라 직업훈련원이 육성'다자완'씨는 "기자재가 없어 강의 위주로 진행되는 다른 직업훈련원이나 학교와 달리 한-라 직업훈련원에서는 실제로 컴퓨터를 다루면서 경험을 쌓아 졸업하면 언제든지 산업현장에서 제몫을 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특히 "직업훈련원이 기숙사를 갖추고 있어 지방의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있다"며 흐뭇해했다. 라오스 공업근대화의 기반을 닦고 있는 '한-라 직업훈련원'은 2004년 11월 대한민국 정부가 지어서 라오스 정부에 기증한 것이다. 컴퓨터, 자동차, 목공, 봉제, 전기수리, 전자수리 등 6개 과로 운영되며, 17명의 교사가 300여 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KOICA에서는 이한구, 최화숙 봉사단원을 파견해 교사들에게 자동차 수리와 컴퓨터를 교육하고 있다. 라오스는 그동안 대부분의 숙련된 기능 인력을 베트남이나 태국 등 인접국에 의존해 왔지만 앞으로는 한-라 직업훈련원 출신들이 이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라 직업훈련원 캄피앙 부원장은 "1학기 졸업생 대부분이 직업을 찾았다"며, "대부분의 선생이 한국에서 연수를 받았고, 또 이한구, 최화숙 봉사단원이 새로운 기술을 계속 전해줘 교육의 질이 높다"고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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