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8년 10월, 교도소로 호송 중이던 수십 명의 죄수들이 몸 속에 미리 감춰뒀던 쇠꼬챙이 등을 이용해 수갑과 포승줄을 풀고 교도관을 덮쳐 권총 한 자루와 실탄을 뺏고 탈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죄수들은 교도관들을 찔러 상처를 입히고 호송버스까지 탈취해 달아났다. 버스에 타고 있던 죄수는 모두 25명. 이들 가운데 12명이 탈주를 했는데 5명은 바로 검거됐다. 하지만 치밀하게 범죄를 사전 모의했던 지강헌 등 7명의 죄수들은 집단으로 탈출을 해서 무려 9일 동안이나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니면서 급기야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인질극까지 벌인 사건을 우리는 기억한다. 위험한 탈주극이 끝난 것은 10월 16일. 시민들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던 지강헌 등 4명의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은 검거됐고, 두 명은 그 자리에서 자살을 했다. 이때 경찰에 의해 사살됐던 두목 지강헌은 ‘우리나라는 돈만 있으면 다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라는 말을 해 세간에 화제가 됐었다. 흉악범이 남긴 한마디가 지배한 20년 기막히게도 흉악범 두목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인질극까지 벌였던 지강헌이 남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한 마디는 그 후 20년 동안 법무부나 검찰에 멍에처럼 머물러 있다. 법조비리 사건이 있을 때마다 망령처럼 등장하는 이 말에 어쩌면 많은 법조인들은 억울함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법무·검찰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쌓여있다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렇게 불신이 쌓이게 된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들쭉날쭉한 형량 때문이다. 같은 범죄인 경우에도 형량이 다르게 선고되고, 이런 판결들이 쌓이면서 '고무줄 형량'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국민들의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법무부와 검찰은 변화전략계획 ‘희망을 여는 약속’을 통해 양형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법무부의 이런 노력은 형사재판을 하는데 있어서 양형기준을 마련함으로써 개별 법관에 따라 다를 수 있는 양형의 편차를 줄여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취지다. 또한 개별 사건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검찰의 구속과 구형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신뢰받는 검찰의 출발, 양형기준 정립에서부터…이를 위해서 법무부는 대법원에 독립적인 ‘양형위원회’를 설치하여 구체적인 양형기준을 정립하고 이를 국민에게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그 기준을 벗어나는 판결이 내려질 경우에는 판결문에 그 이유를 정확히 기록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또 법무부는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구속영장 청구기준을 마련하여 시행할 것을 대검찰청에 지시하여 현재 대검찰청에서 ‘구속수사 기준에 관한 지침’을 제정하고 있다. 이 지침은 학계, 법조계,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검찰정책자문위원회의 자문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구속기준에 관한 공청회 개최, 일선 검찰청의 의견수렴 등의 과정을 거쳐 2006년 상반기 중 제정·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이 지침에는 구속수사에 관한 일반적 기준을 비롯하여 개개의 범죄유형별 구속기준을 가급적 상세히 규정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 지침이 시행되면 향후 구속여부에 대한 국민들의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것과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형사사법시스템에 대한 국민신뢰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와 함께 법조계의 오랜 관행인 전관예우를 근절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 중이다. 전관예우를 없애기 위해서 법무부에서는 구속영장 청구기준 등 검찰의 사건처리 기준을 정비하고 있다. 또한 법조비리 사범에 대한 지속적인 단속을 실시하고, 내부 감찰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만에 하나 생겨날 수 있는 각종 비리를 철저히 차단할 계획이다. 연이어 구속되는 재벌총수들 최근 들어 전·현직 재벌총수들이 연관된 사건과 재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전례 없이 이들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H자동차 회장이 구속됐고, 5월 30일에는 전 D그룹 회장에게는 징역 10년에 추징금 21조 원이라는 중형이 선고됐다. 일각에서는 이들이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 불구속되거나 형량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하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지만 법무·검찰은 단호한 의지로 이를 막았다. 이른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망령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두고 현직 변호사 김 모 씨는 이렇게 말한다. “법무부나 검찰로써는 참 어려운 결정이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마치 지금까지는 형량을 마구잡이로 정한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으니까요. 실은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많은 법조인들이 소신껏, 정직하게 양심껏 일을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법무부나 검찰에 대한 불신을 없애기 위해서 양형기준 마련은 필요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법을 어긴다면 재산이 많거나 적거나, 배움이 많거나 적거나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법의 잣대가 공정하게 드리워진다고 믿는 그날까지 법무부의 이런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법이 우리 사회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것을 법무부나 검찰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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