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이 시,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이다.
신동엽 시인, 민족시인이자 대한민국의 유명한 문학인이고 우리 충청남도가 낳은 자랑스런 인물이다.

▲ 생가터 표지석

▲ 부여국민학교 5학년때 모습

▲ 시인의 생가 바로 앞에서

▲ 생가 바로 왼쪽 뒤에 마련된 문학관

▲ 생가와 문학관 앞 마을 골목길
시인은 부여 출신인데 도민리포터인 필자도 그동안은 막연히 ‘존경스러운 문학인’이라고만 생각했다.
헌데 최근에 시인의 고향인 부여에 생가지를 잘 정비해서 외부인들을 맞이할수 있도록 꾸며 놓았고, 그곳에 시인의 시혼을 달랠수 있는 문학관을 함께 만들어 놓았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다.
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역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자료와 함께 시인을 추억해 볼수 있는 여러 희귀한 자료들이 문학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시인은 1930년 8월에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여국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전주사범대학에 다니던 중 이승만 정권의 친일 미청산에 항의하는 동맹 휴학으로 학교에서 퇴학되었다.

▲ 문학관 표지

▲ 문학관 입구에 있는 흉상

▲ 문학관 내에 걸려있는 시인의 젊은시절 사진

▲ 참여정부 시절 유가족이 받은 훈장
이후 6.25가 터졌고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었다가 귀향조치 되어 집으로 돌아오던중 너무 굶주린 나머지 민물 게를 잡아 생으로 먹었다가 이것이 간디스토마로 발병했다.
그 뒤로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후 서울 돈암동에 헌책방을 열었고 이곳에서 부인 인병선 여사를 만났다.
이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입선했고, ‘산에 언덕에’, ‘아니오’ 등을 담은 시집 ‘아사녀’를 내었다.
1975년에는 신동엽 전집이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었으나 내용이 긴급조치9호 위반이라는 이유로 판매금지당한적도 있다.
실로 파란만장하고 부침이 넘치는 인생이었다.
이제 평화가 찾아온 오늘날, 우리는 신동엽 시인을 통해 하늘을 보았고, 잠시나마 열린 하늘을 통해 자유의 푸르름보 맛보았다. 그리고 그 가슴시린 하늘은 모두의 가슴에 때로는 가슴 뜨거운 희열로, 때로는 상처로 자리하게 되었다. 과연 우리들은 그때 하늘을 보았던 것인가?
우리 세대에게 그런 감성을 주었던 시인은 6.25때 군대에서 돌아오다 먹은 민물 게에게서 얻은 간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이어져 요절하고 말았다.

▲ 시인의 학창시절 통신표(성적표)

▲ 시인과 관련된 많은 출판서적

▲ 부인 인병선씨에게 보낸 편지

▲ 시인에게 온 여러 엽서들. 오늘날로 말하면 팬들로부터...

▲ 시인이 공부했던 책들
신동엽 시인을 두고 우리는 반봉건, 반외세의 민족 시인이라고 평한다. 그는 외세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기엔 좌우의 극심한 갈등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연이어 들이닥친 한국전쟁이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와 아픔을 남겨주었고 그런 여러 주변 상황이 시인에게 민족적, 저항적, 아나키적 성향의 문학관을 갖게 했던 것이다.
신동엽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껍데기는 가라’에 대해 한 문학 평론가는 "그 어떤 사회과학자의 명쾌한 논문도 이 시의 선명한 메시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한적 있다.
오늘, 진정한 민족 시인이었던 신동엽의 외침, "껍데기는 가라"를 다시한번 되뇌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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