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하면 대다수가 충북 보은면에 자리한 속리산 법주사를 떠올린다. 속리산 법주사는 신라시대로부터 고려, 조선,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창 삼창을 거듭하며 뛰어난 고승대덕들을 배출해낸 큰 도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경북 군위에도 법주사가 있다.
경북 군위군 소보면 달산리 773번지 청화산의 동남쪽 우뚝 솟은 봉우리에 자리 잡은 법주사는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심지왕사가 창건했으나 조선 인조원년에 소실되어 현종원년(1660)에 재건된 전통사찰이다. 지금은 경내에 보광명전(菩光明殿)과 부속건물, 산신각, 왕맷돌, 그리고 법당 앞에 서 있는 본존 5층 사리탑(법주사 오층석탑) 등이 있다.
법주사로 가려면 먼저 군위IC를 빠져나와 군위, 안동으로 향하는 5번 국도를 이용한다. 5번 국도를 달려 군위읍을 조금 지나 소보면(사과시험장)쪽으로 내려간 후 구미, 상주방면으로 약 10km정도 달린다. 소보 읍내를 가로질러 직진해 가면 맞은편에 소보면사무소가 나오는데 면사무소를 바라보고 오른쪽 선산, 안계 방면으로 우회전해 쭉 가면 다리를 지나 달산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차를 좌회전해 법주사표지판을 보고 들어가 약 5분 정도 직진하다 보면 길이 끊어지고 법주사로 오르는 작은 비포장도로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법주사가 나온다.
속리산의 법주사와는 그 규모나 역사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찰이 멸실과 존폐의 역사를 거듭해 온 사실을 감안한다면 군위의 법주사는 불맥을 면면히 이어온 사찰 축에 든다. 그것은 법주사에 남아 있는 여러 정황을 미루어 유추할 수 있다. 신라 소지왕때 심지왕사, 또는 은점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군위의 법주사가 얼마나 사세가 대단했는지는 먼저 왕맷돌을 통해 짐작할 수 있겠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2호로 지정된 이 왕맷돌은 국내에서 발견된 맷돌 중 가장 크고 구멍이 4군데나 뚫려 있는 원형의 석조물로 암·숫돌 각각 직경 115cm, 두께 15.5cm 의 크기에 열 사람이 한꺼번에 힘을 합쳐 들어야 겨우 들 수 있을 정도로 육장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50여년 전 절 남쪽 200m 가량 떨어진 밭두렁에 묻혀 있던 것을 신도들이 발굴해 현재 위치에 놓았다고 한다. 3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왕맷돌만 보더라도 당시 절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고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여기서 수행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 곳에는 한때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던 본존5층 사리탑(법주사 5층석탑)이 전해오고 있는데 지금은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퇴락한 채 서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7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탑으로 이중 기단위에 쌓은 높이 3.56m의 오층 석탑이다. 상층기단과 상대 덮개돌 및 4층 이상의 몸돌과 지붕돌은 유실되었다. 하층기단 덮개돌에는 2단의 굄이 있어 상대중석이 놓였던 흔적이 있다. 초층에서 3층까지의 몸돌 및 지붕돌이 같은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붕돌 상면에는 굄이 없고 낙수면이 깊고 전각은 경미한 곡선으로 되어있다. 4층과 5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없고 지붕돌의 양식도 다르다는 점 등으로 보아 4층 이상의 부재는 이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구 보광명전(菩光明殿)건물이 있는데 맞배지붕에 다포계 양식의 공포를 지닌 법당의 외부에는 심우도와 부처님전법도와 열반도, 나한도 등이 그려져 있다. 이 전각은 사찰 측에 의하면 1575년 각성스님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전하며 강희 30년 신미년(1690)에 다시 지어졌다고 하니, 대체로 조선중기 때 지어진 건물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또 1977년 법당 천장의 비가 새는 것을 고치기 위하여 용마루를 헐었는데, 그곳에서 화엄경 80권이 발견되었고(현재 은해사 보관),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본당 서편에 파불(破佛: 파손된 부처) 15좌를 매몰하고 5불상은 대법당 앞에 매몰해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화재 혹은 재난을 당하기 전 이 절의 규모가 매우 웅대하였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만하다.
2001년에는 옛 보광명전을 그대로 두고 신 보광명전이 건립되어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법당의 모습을 새롭게 이어가게 되었고 법당 안에 안치되어 있는 세 자리의 아미타불상의 인자하신 모습은물론 그 형체가 유독히 큰 모습이 다른 절에서는 흔히 볼 수 없다. 그리고 법당 뒤 벽에 걸려 있는 길이 23자 5치, 폭 15자가 넘는 괘불도(掛佛圖)는 상흔이 심하여 선명하진 못하나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소중한 불교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듯 전해 내려오는 여러 유적들과 기록들을 통해서 법주사의 옛 사세를 짐작하고 남는다. ‘부처님의 법이 상주하고 있는 도량’(法住)이라는 자신감 차 있는 사명(寺名)을 지었던 것도 이러한 정황들이 뒷받침해 주고 있는 듯 보인다. 지금은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으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법당을 신축하고 오래된 전각을 정성껏 보수해 지금의 법주사에는 오로지‘법’에 기대어 이를 구하고자 하는 스님들의 매진이 계속 이어져 나가고 있다. 300년 옛 역사를 안은 법주사의 변화는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더 아름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