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 대기업정책 기조는 공정한 ‘게임의 법칙’ 지키자는 것
‘재벌’이 다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논란은 삼성의 옛 안기부 도청 파일(X파일) 사건에서부터 금산법(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배정에 대한 법원의 배임죄 판결 등으로부터 촉발됐다. 한국경제신문은 지난 5일 사설에서 에버랜드 전환사채 관련 법원 판결을 놓고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이번 판결이 혹시라도 최근의 삼성 때리기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라며 “기업 스스로 선택해야 마땅한 지배구조 문제 등에까지 사사건건 개입해 온 것이 현실… 정부 · 정치권 · 시민단체 등이 포위하다시피 압박한다면 도대체 누가 이 땅에서 기업을 하고 싶어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같은 날 열린 재경부 국감에서도 한나라당 의원들은 “삼성과 관련해 대기업 때리기가 굉장히 심각하다”며 “노무현 대통령은 반기업 정서는 없다고 했지만 이에 동의하는지, 삼성을 외국기업으로 보는지 아니면 국내 기업으로 보는 지에 대해 부총리는 답변하라”고 추궁했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복거일씨는 지난달 26일 동아일보를 통해 “정부와 좌파 시민단체들이 연합해서 재벌을 포위한 형국”이라고 규정하고 “재벌은 우리 사회의 특수한 환경에 맞도록 진화했고, 지금 그보다 효율적인 기업형태는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겨레신문은 지난 5일자 사설을 통해 “다른 재벌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삼성을 본받아, 비상장사나 전환사채 등을 이용해 세금 없는 대물림을 해 왔다”며 “이런 일까지 반기업 정서 운운하며, 기업을 못살게 구는 것이라고 왜곡해서는 안 된다. 재벌 승계 과정만 투명해져도 우리 경제 체제는 한단계 도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론부터 말해 최근 삼성을 둘러싼 논란의 본질은 일각에서 얘기하는 ‘삼성 때리기’도 아니며 참여정부의 좌파적 반기업 철학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특유의 기업 소유지배구조 왜곡에서 출발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삼성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바라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더구나 경제분야 성적이 정권 평가에서 가장 큰 배점을 차지하는 상황에, 참여정부가 의도적으로 삼성을 ‘때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다만 한국경제살리기 차원에서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집단, 즉 재벌의 '지배구조’를 보다 건강한 체질로 바꿔나갈 것을 주문할 뿐이다. 정부의 대기업집단에 대한 정책 기조는 ‘게임의 규칙’을 지키자는 것이다. 제 아무리 실력이 출중한 선수라도 규칙을 어기며 얻은 1등은 의미가 없으며,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킬 수도 없다. 건전한 소유지배구조와 금융-산업자본의 분리는 참여정부가 지향하는 규칙의 핵심이다. 일각에서는 기업 지배구조에 정답은 없으며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좋은 지배구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칙이 바로 서지 않은 성과가 ‘모래 위에 쌓은 탑’처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뼈저리게 절감한 바 있다. 세계경영을 부르짖던 거대기업대우의 몰락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을 힘들게 했는가. 참여정부 대기업집단 정책의 두 축인 소유지배구조 개선과 금융-산업자본 분리가 왜 중요하며 국민 경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자세히 알아본다. ◇ 한국경제의 시한폭탄, 재벌 소유지배구조 우리나라의 경우 대기업 집단 총수 일가는 불과 5% 정도의 적은 지분만으로 44% 가량의 계열사 지분을 조종하며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의 경우 전체 납입자본금은 11조6034억원이며, 이 중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총수 일가 지분은 고작 0.8%에 불과한 반면 계열사 지분은 49.8%에 이른다. 총수가 이처럼 적은 지분만을 갖고도 소속 개별 회사의 경영을 좌지우지하면 책임과 권한의 불일치가 발생케 된다. 즉 총수는 회사 경영의 전권을 행사하면서도 경영활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불안한 구조인 셈이다. 또한 이같은 구조는 총수가 주주권과 임원 임면권 등의 수단으로 주주총회 · 이사회 등을 사실상 장악함으로써 내부 견제시스템의 작동을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총수가 내부 견제를 받지 않는 구조는 불법 비자금 조성이나 회사자금으로 개인대출 이자를 지급하는 등 사익 추구의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이로 인한 피해는 물론 고스란히 일반 주주들의 몫이다. 이와 함께 왜곡된 재벌의 소유지배구조는 독립된 중소기업과의 공정 경쟁을 저해하는 기능을 한다. 계열사간 출자로 형성된 집단의 힘을 이용해 계열사간 상호보조, 내부거래 등 부당한 방법으로 서로를 지원하고 주요 시장에서 독과점 구조를 고착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01년에는 모 정유회사가 원유 정제시 부산물로 나오는 자동차 세제를 계열사가 운영하는 주유소에만 독점적으로 공급, 중소 자동차 세제 공급업체들이 줄도산한 사례가 있었다. 전체 제조업 고용의 77% 가량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잃게 되면 고용창출이 불가능해지고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같은 계열사 순환출자의 폐해를 막기 위해 정부가 유지하고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순자산액의 25% 이상을 다른 계열사에 출자하지 못하도록 한 '출자총액제한제도'인 것이다. 아울러 사외이사 강화, 소액주주권 강화, 회계 투명성 강화를 지속적으로 주문하고 있는 것 역시 우리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를 건전화ㆍ선진화하기 위한 방책이다. 국내 재벌들의 소유지배구조는 해외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만의 이상현상이다. 유럽은 지배주주가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경우는 있으나 그 소유지분이 커서 소유와 지배간 괴리가 전혀 없으며, 일본은 상호ㆍ순환출자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는 많으나 총수가 존재하지 않고 계열사들의 독립경영체제로 이뤄져 있다. 글로벌 기업이 되려면 그에 걸맞는 글로벌 소유지배구조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 참여정부 재벌 정책의 근간인 것으로 판단된다. ◇산업-금융자본 분리, 시장경제 기본원칙이다 최근 삼성의 공정법 헌법소원 제기 및 금산법 적용 논란은 모두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라는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에 삼성의 지배구조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비롯됐다. 금융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은 기본적으로 고객의 돈이다. 그런데 금융회사가 재벌 그룹에 소속돼 있으면서 보유 자산을 총수의 지배권을 위해 쓴다면 이는 돈을 맡긴 고객의 의사와는 상충되는 것이다. 국민 저축이나 위탁자산이 산업자본과 결합하면 일부 산업의 부실이 곧 바로 국민 경제 전체의 위기로 확대될 수 있는 ‘폭발물’을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아울러 금융보험사의 금융자금이 효율적인 곳에 나눠지지 못하고 소속 계열회사에게만 집중 배분됨으로써 자원 배분 기능이 왜곡되고, 산업자본에 대한 감시와 견제 기능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 말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금융계열사 의결권을 2008년까지 단계적으로 15%까지 낮추기로 했으며, 금산법 24조에서 금융 계열사가 비금융 계열사 지분을 5% 이상 취득할 경우 당국의 승인을 받도록 한 것이다. 산업-금융자본 분리와 관련해 특히 삼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독특한 지배구조와 관련이 있다. 삼성그룹은 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삼성전자-삼성카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갖고 있어, 삼성생명의 의결권을 제한하면 전체 지배구조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삼성그룹은 다른 그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금융보험업의 비중이 높다. 삼성그룹 9개 금융계열사의 총 자산은 117조6000억원으로 전체 자산 209조1000억원의 56.2%에 달한다. 자산 2조원 이상 55개 기업집단 중 금융보험사의 자산 비중이 삼성보다 높은 곳은 태광산업 · 한화 · 동양 등 3개 그룹 뿐이며, 47개 그룹은 금융보험업의 자산 비중이 10% 미만에 그치고 있다. 정부가 특정 기업을 타깃으로 정책을 펴는 시대는 지났다. 참여정부는 다만 시장 원칙을 분명히 지켜나가겠다는 입장을 수차에 걸쳐 천명해왔다. 최근의 ‘삼성 때리기’ 논란은 그만큼 삼성이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는 동시에, 시장 원칙과 충돌하는 부분 또한 적지않다는 점을 반증한다. 정부는 우리의 현 상황을 선진시장 경제로 진입하는 전환기로 보고 있으며, '시장 효율’과 ‘반칙없는 시장 경제’라는 큰 그림이야말로 장기적으로 한국경제의 든든한 기초가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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