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태는 1900년 12월 28일 부산 동래의 하단 남창마을에서 손수인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921년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1924년 3월 와세다 제1고등학원을 졸업하고 그 해에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입학하여 1927년 졸업하였다. 그 때 지도교수 니시무라를 만나 민속학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1925년부터 동양문고를 드나들던 그는 1930년 동양문고의 사서로 근무하며 시라토리와 같은 학자를 만나게 된다. 1932년 연영화 여사와 결혼한 그는 1933년 장남을 보았으며, 1934년 귀국하여 연희전문에 출강, 동양문화사를 강의하였다. 또한 1934년 9월 보성전문학교가 안암동으로 옮기면서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며, 문명사를 강의하였으며, 1937년에는 도서관장을 맡았다. 이 때 가장 가깝게 지내던 이가 안호상 박사였으며, 조윤제와 이인영에게 연구실을 제공하며 동산학파를 형성하였다.
해방후 서울대 사학과 교수가 된 그는 국사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국사교재를 활발하게 출판하였으며,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이 되었다. 한편 서울대 사범대학장을 하다가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문리과대학장 재임시 6.25가 발발하자 납북되어 1960년대 중반 세상을 떠났다. 북한에서의 학문활동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손진태의 학문활동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민속학연구를, 1940년대에는 한국사연구를 주로 하였다. 그의 최초의 저서는 {조선상고문화의 연구}로 1926년에 일본어로 쓰여진 것인데 1927년 {동광} 3권에서 8권까지 한글로 연재하다가 중단되었다. 최근 이 원고뭉치가 발견되어 고려대박물관에서 원문과 한글 번역을 함께 출간하였다. 1927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온돌, 민간설화, 원시신앙 등에 대한 민속학 논문을 왕성하게 발표하였는데 이것들은 해방후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와 {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롤 출간되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서는 민속학 논문이 거의 없고 역사와 사상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는 {조선민족사개론}상(1948)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던 때부터 신민족주의에 입각한 한국사의 저술을 계획하였다. 그는 이어 {조선민족사개론}하권을 계획하여 그 서문을 쓰기도 하였으나 6.25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하권에는 고려시대사 뿐만아니라 조선시대사까지 포함시키려 하였으며, 이러한 민족사개론을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국사교육에 있다고 하였다.
그가 해방후 {우리 민족이 걸어 온 길}, {국사대요}, {국사강화}, {이웃나라의 생활}등을 저술한 것은 나라를 찾은 시점에서 우리 국사교육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문교부 차관 및 편수국장을 역임하며 우리 국사교육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납북된 후 북쪽에서는 학문적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그의 학맥은 연결되지 못하였다. 그나마 1981년 {손진태선생전집}이 영인되어 후학들이 연구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 그의 미발표 육필원고들이 발견되어 고려대박물관에서 {남창 손진태선생유고집}1-2권이 간행되어 손진태 선생의 학문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리라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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