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정 / 북갤럽『비전 일지매』는 중국무협영화의 격투 장면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진정한 우리의 ′맞장′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이런 결투 장면은 작가의 공이 가장 많이 들어간 대목이다. 작가는 서슴없이 말한다. 칼을 수백 번 휘두르는 결투는 최소한 조선에서는 없었다고. 『비전 일지매』가 활극적 요소를 지녔으면서도 그 한계를 아슬아슬히 넘어선 것은 기축옥사라든가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을 그 배경으로 깔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일지매나 그의 스승 지함두가 보여주는 발도술(拔刀術) 때문이기도 하다. 그 발도술이 전투의 와중에서는 디테일하게 그려지지는 않지만, 이를테면 지함두가 산채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장면에서는 발도술의 일단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단 한 번의 베기′의 의미를 가르치는 지함두의 모습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검술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검술을 만나게 된다. 이 또한 『비전 일지매』답게 하는 한 요소이다.
허수정 장편소설 『비전 일지매』는 ′어린이 날′ 특선으로 보던 그 ′소년 일지매′가 아니다. 조선시대의 ′광주사태′로 명명됨직한 기축옥사를 시간적 배경으로 일지매는 등장한다. 요즘 같은 정쟁의 회오리가 조선조를 들었다 놨던 ′기축옥사′는 조선조의 체제 내적 모순이 극대화된 결과로서 성종 이후 연산군과 드라마 <여인천하>의 시대인 중종을 거치면서 극심한 ′안개정국′을 연출한다.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척신정치에 숨죽여 있던 사림(士林)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필두로 ′안개정국′을 ′예측 가능한 정치′로 전환시키기 위한 야심찬 프로젝트를 준비하지만, 척신의 억압이 사림의 무의식에 깊이 아로새겨진 결과였을까, 사림들 자신의 정치적 야욕에 의해 당쟁만 일삼게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때 율곡의 제자인 서인이 퇴계의 우산 아래 있는 동인을 축출하는 ′음모′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기축옥사다.
『비전 일지매』의 일지매가 어린이 날 특선 ′소년 일지매′와 다른 점은 ′소년 일지매′가 탈역사화된 이미지로서만 등장한다면, 『비전 일지매』의 일지매는 단순히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역사의 소용돌이에 뛰어든다는 점이다.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임진왜란은 한 나라의 체제 모순이 국제적 관계에까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 사건이다. 일지매는 그 소용돌이에서 권력의 추가 기우는 쪽으로만 쏠리는 정치모리배들을 응징하면서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일지매는 스스로 그의 스승과 더불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베러 왜(倭)로 진입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생의 허무를 아는 한 인간임을 느끼게 된다. 이순신의 수군의 잇단 승리와 분조를 이끈 광해군의 내정, 그리고 들불 같은 의병들의 저항으로 임진왜란은 끝나지만, 조선에는 보다 나은 정치가 보장되지 않고 점점 더 안개 속으로 빠져든다. 임진왜란에 의해 촉발된 명청 교체 정국이 전쟁 후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는 것이 그 이유다.
『비전 일지매』는 허구다. 그러나 이 허구가 보여주는 스케일은 스펙타클과 시대를 고민하는 지식인들의 고뇌를 통해 소설 읽기의 다른 재미를 더해 줄 것이다. 물론 한 권의 소설이 책을 읽는 재미와 문학적 감동을 다 주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비전 일지매』는 읽는 재미를 한층 업그레이드 한 소설임을 숨기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가의 상상력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실을 함께 다루고자 한 부분도 적잖이 평가되어야 할 노고라고 해도 큰 허풍은 아닐 것임을, 독자들이 판단해주리라 믿는다.
<김동진 기자> dong@krnews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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