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지난 24일자에서 한국이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국민의 일체감을 높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크고 하나된 나라 대한민국′을 만끽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한국 국민이 선수의 모습에 국가와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한국사회에는 강렬한 자부심과 일체감이 확산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신문은 이어 ′그러나 열광의 경기장, 흥분의 거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면 남북분단, 정당대립, 지역대립의 현실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면서 ′현실사회를 덮고 있는 분위기는 무거우며 이는 ′대한민국′과는 거리가 멀다′고 덧붙이고 있다.
애국심과 태극기를 앞세운 엄청난 응원열기는 ′국민통합′과 ′사회통합′ 측면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물론 박노자 노르웨이대 교수 등 일부 지식인들처럼 ′집단광기′적 색채를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지만, 부정보다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크다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일본근현대사가인 박환무 숭실대 강사는 ′이번 월드컵의 의미는 무엇보다 한국인으로 하여금 ′한국인임′(being Korean)을 맛보게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서 ′월드컵 이전 한국사회 전반에 팽배했던 허탈감을 해소하는 공간으로 한국인은 월드컵과 축구를 선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평가는 요미우리신문의 표현을 빌린다면 한국인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일체감′을 확인한 계기가 됐다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그동안 한국에는 한국인임을 느끼게 하는 표상, 예컨대 누구나 동의하고 공감하는 커다란 상징이나 ′국민시인′ 같은 존재가 없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관공서나 국경일용에 머물렀던 태극기와 애국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국민패션′ ′국민구호′로 재생했다는 사실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제 문제는 월드컵의 폭발적 열기와 그것이 촉발한 ′국민정체성′이 월드컵 폐막 이후 한국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모될 것인가에 있다.
우선은 이번 월드컵의 열기를 우리 스스로가 냉철히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긍정, 부정의 측면들을 가려내 우리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과 관련, 민속학자 주강현 박사는 ′문화상대주의′를 강조한다. 우리 문화가 소중한 만큼 다른 문화도 소중함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아직도 여러 측면에서 ′세계시민′이 됐다고 보기 어려운 우리들의 자화상, 그리고 그 엄청난 월드컵 문화행사의 홍수 속에서 외국문화의 국내 소개에는 아주 인색했다는 점 등을 상기할 때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이와 함께 이번 월드컵이 분출한 열기를 대회 이후에도 점진적으로 흡수하면서 모처럼 형성된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속적이면서도 ′건전하게′ 확인하는 다양한 장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월드컵이 끝난 다음엔 무슨 재미로 사나?′ 하는 시정의 이야기를 가벼운 농담으로 넘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축제 분위기, 스포츠처럼 격렬하지 않은 대신 지적.정서적 충족감을 안길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방안은 한 마디로 ′이제는 스포츠를 넘어 문화′다. 우리나라에서 스포츠는 스포츠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위해서도 충실히 봉사해 왔다. 이제는 국민들의 정신적.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세계인들을 향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세계문화를 향한 우리의 개방성을 여유롭게 입증할 수 있는 문화의 장을 열어가야 한다.
월드컵을 개최하고 전세계를 경악시킨 성적을 거둔 나라에 축국 월드컵만한 수준과 규모의 ′문화 월드컵′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 민족에 대한 세계의 평가는 ′축구 잘하는 나라′ 이상으로는 결코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전반적 문화수준의 향상을 염두에 두면서, 가령 세계적 수준의 문화축제를 출범시키는 것도 문화당국자들로서는 한번쯤 고려해 볼만한 일이다.
<박규하 기자> p호@krnews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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