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리우스 푸치크 저/박수현 역 / 모티브 / 8,000원
1940년대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살아낸 한 체코 지식인의 마지막 고백작가 폴 오스터는 추리소설만큼 낭비가 없는 책이 없으니, 모든 구절과 구성 하나하나가 다 사건을 푸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쑥쑥 읽히고 낭비없는 책으로 ‘실화’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길 바란다. ‘1940년대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살아낸 한 체코 지식인의 마지막 고백’이 담긴 이 구시대의 유물 같은 낡은 이야기엔 뭔가가 살아있다. 목숨 걸 만한 일도 없이 그럭저럭 ‘일상’을 살아내는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힘든, 살아있음에 대한, 아, 그것은 곧 ‘신념’에 관한 이야기다.1942년 4월 어느 아름답고 따스한 봄날 저녁, 신문 기자이자 체코 공산당 기관지인 <루데 브라보> 편집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푸치크는 나치의 감시가 삼엄한 체코의 한 거리를 바삐 걷고 있었다. 자신의 충실한 지지자 옐리네크 부부의 집에서 오늘 간단한 회동이 있었던 것.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약속에 나타나지 않으면 걱정할 동지들을 위해 나선 길. 그리고 차 한잔 나누자마자 들이닥친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의해 조직원 모두는 반공산주의 수사부인 유명한 게슈타포 본부 ′페체크 빌딩′으로 끌려간다. 온몸의 뼈가 흐물해질 때까지 맞고, 이가 모두 떨어져 나가고, 들것에 실려 계속 심문을 당하는 동안에도 조직에 대해 일체 함구했던 푸치크. 하지만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드러난 조직은 이미 뿌리까지 허옇게 드러나 있었고, 그 배신의 장본인은 무덤에 갈 때까지도 변치않을 줄 알았던 부관 ′미레크′였다. 그는 이때부터 어느 간수의 도움으로 감옥 안에서의 여러가지 단상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한다. 몇 대의 매를 면하려고 깨뜨려버린 인간의 신념과 용기란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 피투성이가 된 남편을 보고도 "모른다"고 부인해야만 했던 아내를 향해 부르던 감옥 안에서의 낮은 연가, 노동절 ′메이 데이′에 여자죄수들의 휘파람으로부터 시작된 장엄한 인터내셔널 행진까지, 한 공산주의자의 파시즘에 대한 고발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훌쩍 뛰어넘는다. 정작 이 작은 책이 가진 미덕은 사실의 기록, 그 너머에 있다. 스프를 삼키지도 못할 만큼 헐어버린 입을 악물고, 피멍으로 후줄근한 몸을 일으켜 쏟아낸 인간의 신념에 대한 강인한 확신, 죽음을 함께 한 동지들을 추억하는 그의 건강한 기억들로 이 책은 ′살아있음′에 대한 충일감이 장마다 흘러넘친다. 그 생명력이야말로 이 구시대 구닥다리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를 붙잡는 강렬함에 다름 아닐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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