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선생은 한국 최고의 명가 백사 이항복 10대손 출신이다. 또,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일찍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30대 나이에 이미 평남 관찰사를 역임하는 등 중요 직책을 거친 엘리트였다. 어느 하나 남부러울 것이 없던 선생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생사를 알 수 없는 만주로 망명한 것이 1910년, 선생의 나이 40대였다. 그곳에서 선생은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고 인력을 양성하였다. 50대에 들던 1919년부터 북경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참여하고 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그러다가 60대에 들어서는 임시정부를 이끌고 기나긴 고난의 길을 나섰으며 정부를 지켜나가는 버팀목 구실을 해냈다. 선생이 중경에서 도착한 뒤에는 주로 임시정부의 재무부장을 맡아 재정을 담당하였는데, 이 때가 선생의 나이 70대라는 고령이었다.
1910년 말에 망명하여 1945년 11월에 환국할 때까지 선생의 행적은 독립운동의 현장 바로 그곳이었다. 즉 일제강점기는 그대로 선생의 독립운동 시기였고, 선생의 발자취는 바로 독립운동 현장이었다. 선생은 독립운동 기간 동안 항상 목소리 낮추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 인물이다. 또 격렬한 투쟁의 현장에 나서거나 좌우 분화와 갈등의 길목에서 맞부딪치며 조용히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1953년에 서거하였고,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처음에 서울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에 있는 현재의 묘소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민족을 위해 바친 선생의 뜻과 공을 기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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