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경술국치 직후 신민회가 발각되어 주요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는 상황에서 일제의 검거망을 피한 이필주는 1911년 경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후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貞洞敎會)에서 근무하면서 조국독립에 대한 이상을 품고 이상재(李商在) 최병헌(崔炳憲) 최성모(崔聖模) 오화영(吳華英) 신홍식(申洪植) 박동완(朴東完) 오정도(吳貞道) 현순(玄楯) 등과 자주 만나 친분을 두터이 하였다. 이필주는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이 구체화되던 1919년 2월 27일 자기 집에서 이인환(李寅煥)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함태영(咸泰永)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오화영 최성모 박동완 등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함태영이 최린(崔麟)으로부터 가져온,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 초안을 회람하고, 기독교측의 민족대표로 다음날인 28일 밤 재동(齋洞)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전개에 따른 계획을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경성감옥에서 출옥한 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종교활동과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말년에는 수원 남양교회(현재 화성시 남양동 소재)에서 목회생활을 하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1942년 4월 2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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