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 김중건은 1889년 12월 함남 영흥군 고령면에서 탄생하였다. 도호(道號)는 소래, 별호(別號)는 몰나(沒那), 또는 불폐(不吠)이며, 법명은 마루진을 사용하였다.
선생은 종교를 통한 사회개혁의 커다란 뜻을 품고 1909년 천도교에 입교하여『천도교월보』등을 통해 천도교의 교화와 교리사업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천도교 지도층과의 내부 갈등 및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등으로 구국운동이나 사회개혁의 불가함을 절감하고 낙향하였다. 낙향한 선생은「2·1결의단」을 결성하여 천도교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1912년 『천기대경(天機大經)』 등의 저서를 완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1913년 1월 원종(元宗)을 창립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 및 서울에서 전법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더욱이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선생은 1914년 북간도 훈춘으로 망명하였다.
선생은 북간도 한인들의 농촌사회를 기반으로 자신이 창설한 원종이라는 종교를 통한 사회결사운동, 교육운동, 무장독립운동을 독자적으로 실천하고자 준비하였고, 이를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이상사회인 무국시대(無國時代)를 건설하려 하였다.
1920년대 후반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전개된 민족연합전선운동에 참여하여 독립군 무장단체간의 규합을 위해 조선민사를 결성하는 등의 노력도 전개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간의 이념적 갈등으로 민족연합전선의 결성이 어렵다고 판단한 선생은 1929년 팔도하자에 어복촌(魚腹村)을 건설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모색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위해 진우회(震友會)를 창설하고, 길림구국군과의 연합을 도모하여 1932년 12월 동녕현에서 일제와 싸우기도 하였다. 이후 길림구국군 내의 공산주의계열의 원조요청을 거부하고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을 지원하게 되자, 공산주의계열에서는 선생 등을 일본의 간첩인 민생단원이라고 날조하고 계속하여 자신들의 부대에 협조할 것을 회유하였으나, 선생이 이를 끝내 거절하자 심한 고문을 가하였고, 선생을 끝내 1933년 3월 24일 45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인정하여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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