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과 겨울의 길목에 자리한 시절. 산과 들마저 비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해마다 습관처럼 맞이하는 손님이 있습니다. 왠지 모를 허전함과 쓸쓸함이지요. '외로움도 깊어지면 병이 된다' 했던가요? 그러나 늦가을의 고독이 깊어질수록 이곳에 가면 이상하게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합니다. 더 깊게, 더 뜨겁게 사그라지는 가을이면 좋겠습니다. 진한 커피 한 잔과 함께 기울어가는 한 해의 노을을 간직하려 길을 나섭니다.
군산 개복동거리와 카페 ‘나는섬’
군산 개복동, 참 오래된 시가지입니다. 일제강점기 이래 군산의 유일한 극장가로서 번성을 누렸던 곳입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신흥개발지역으로 상권이 옮겨지면서 이미 쇠락한지 오래된 거리지요. 그 옛날 누렸던 영화의 흔적조차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곳입니다.
▷전라북도 군산 개복동 거리, 여기저기 벽화가 그려져있다.
변변한 나무 한 그루 없는 개복동 거리엔 그 흔한 낙엽 하나 날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처럼 저무는 가을을 닮은 곳이 또 있을까요. 퇴색된 건물들 틈틈이 이색적인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시선을 모으기도 하지만 낡은 풍경을 채우기엔 역부족입니다. 오히려 나무 끝에 겨우 매달린 마지막 잎새마냥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그 거리 한 구석에 ‘나는섬’ 이라는 카페 하나가 오롯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화려한 색감과 옛 추억을 자극하는 소품들로 단장한 빈티지한 분위기가 묘하게 인상적입니다. 어쩐지 개복동의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놓은 듯합니다. 그곳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십니다. 남루한 거리에서 마시는 한 잔 커피의 향이 더욱 진하게 느껴집니다. 개복동 거리의 카페 '나는 섬' 은 빈티지하면서도 곳곳에 오래전 추억을 떠올리게 할만한 소품들이 개복동의 어제와 오늘을 떠올리게 합니다. 드립커피 한 잔의 향이 남다른 곳이지요.
▷개복동 거리의 카페 나는 섬.
한때 영화를 누렸던 시기를 지나 쇠락한 개복동 거리. 틈틈이 벽화가 그려져 있어 남루함을 감추려 하지만 오히려 가을날 마른 가지에 남은 마지막 잎새처럼 애처로워 보입니다. 개복동 거리에서 멀지 않은 다운타운 거리는 최근 거리를 재단장해서 깔끔해졌지만, 오히려 가장 눈에 띄는 건 옛추억을 떠올리게하는 설탕엿노점. 오늘의 학생들이 이곳을 즐거워하는 모습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개복동 거리에서 멀지 않은 다운타운 거리. 설탕엿노점이 예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동물원 가는 길과 ‘커피발전소’
늘 푸름과 연꽃향으로 가득하던 덕진공원에 연밥이 맺히기 시작할 즈음이면, 항상 떠오르는 길이 있습니다. 동물원 가는 길입니다. 길가에 가득한 플라타너스들이 노랗게 물들어 파란 하늘을 수놓습니다. 행여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이지요. 마치 지난 계절의 추억처럼 한 잎 한 잎 가슴 속에 쌓입니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사그락거리는 낙엽소리는 사소했던 기억마저도 들춰내어 또 다른 추억을 낳습니다. 뭐에 그리 바빴는지. 첫눈이 내리는 때에야 버릇처럼 떠올리곤 합니다. "올해도 동물원 가는 길의 플라타너스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네" 라고 말입니다.
▷푸른 여름을 지나 연밥이 영글고 있는 덕진공원의 늦가을.
살면서 버릇처럼 놓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요? 모두 다 잡아둘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아쉬워만 할 일도 아닌 겁니다. 바쁜 일상 속에 이 가을의 정취를 아직 느껴보지 못했다면 동물원 가는 길을 걸어볼 일입니다. 나무도 쉼을 준비하는 시절, 잠시잠깐 그 길을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안식이 되어줄 겁니다. 덕진공원 앞에는 전주에서 커피맛 좋기로 소문난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커피발전소, 그곳에서 커피향을 음미하는 여유를 부린다면 그것도 좋겠지요.
▷덕진공원 앞의 카페 커피발전소.
도심 속 억새밭 산책과 레알뉴타운의 카페 ‘나비’
전주라는 도시에 산다는 것이 축복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전주천변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심 한복판에 1급수가 흐르는 도시는 흔치 않습니다. 여름 내내 도심의 더운 열기를 푸르게 식혀주던 전주천은 가을이 되면 도심 한복판에 하얀 억새밭을 꽃다발처럼 안겨줍니다.
▷가을날 느티나무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경기전과 황금빛 은행잎으로 빛나는 경기전 풍경.
산책길은 이왕이면 경기전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 일입니다. 느티나무 고목이 노랗게 물든 한옥마을 골목을 지나고 황금빛 은행잎 가득한 전주향교를 지나 전주천으로 들어서면 억새들이 하늘 향해 손을 뻗어 은빛 가을을 만들어 냅니다. 가을이 작별을 아쉬워하며 남기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길입니다.
▷도심속에서 억새를 만끽할 수 있는 남문시장 옆 전주천변.
▷남부시장 레알청년몰 내에 위치한 카페 나비.
천변의 억새밭을 산책한 후라면 남문 시장의 골목을 지나 비밀처럼 숨겨진 레알뉴타운으로 올라봅니다. 젊은 청년 장사꾼들의 재기발랄한 상점들 속에 카페 나비가 다소곳이 앉아 있습니다. 도심 한복판에서의 억새밭. 시장 한복판에서의 드립커피 한 잔. 분명 각별한 가을의 추억이 되어줄 것입니다.